동진면 궁월(弓月)마을
장등리 궁월마을은 동진면사무소에서 남동쪽으로 4㎞지점에 위치한 순농사 마을이다.
조선조 중엽(1630년)에 청주한씨 경상공이 팔도를 유람하다가 현 궁월마을에 도착했다 한다.
당시 4호가 살았으며 지형이 활궁(弓)자 같다 하여 궁상마을이라 불리었다.
경상공은 농토를 일구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장례원 판결사공을 지내며 살게 된 것이 궁월리의 시초였다 한다.
그 후로도 경상공은 큰 벼슬은 하지 못하였지만 농토를 일구며 선비정신으로 살아왔다.
이조말엽 1800년경에 전주최씨 옹황공이 당시 부안읍 옹중리에 정착하였는데, 옹황공 10대 후손이 마을에 이주하면서 타성들이 입촌되었고, 김씨와 이씨는 조동에, 심씨는 통시고을, 임씨등은 솔나무뜸에 모여 정착하며 살았다 한다.
후에 강씨, 최씨등이 솔나무뜸으로 입촌하면서부터 마을 형태가 변하여 달같이 생겼다하여 활궁자, 달월(月)자를 써서 궁월마을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후 조선조 말엽 전주이씨 이등령 좌수가 이주하여 살게 되는데, 이주하게된 동기는 이좌수가 해창에서 세금을 거두는 공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었으나 이좌수를 모함하는 자가 있었고, 당시 이좌수가 탐관오리라는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을 때, 동진면 안성리 선착장에 해적떼들이 몰래 들어와 주민들에게 노략질 해간다는 제보를 받고 말을타고 단숨에 달려가 해적떼를 물리쳤다.
이같은 공적이 높이 평가돼 이좌수는 탐관오리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안성리에서 해창으로 귀향중에 궁월마을을 지나가다가 쉬면서 보니 공기좋고 살기가 좋은 곳이라 하여 공직을 물러나면서 현 궁월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후에 살기좋은 곳으로 소문이 나서 여러가구가 들어와 120여호 이상 가는 마을로 부안군의 대촌락으로 형성되었으나, 1960년 현 고마제 저수지 확장사업 일환으로 조동리, 통시골, 솔나무뜸 일부가 수몰되어야 할 상황에 이르러 주민들이 사방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45호로까지 줄어들었다 한다.
지금은 마을 이장인 심영균(63)씨와 부녀회장인 박경애(67)씨를 주축으로 26가구 50여명의 주민들이 서로 인정을 배풀고 도우며 힘을모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